이찬주/춤평론가
피노키오
영국에서 활동 중인 이스라엘 출신 안무가 야스민 바르디몽(Jasmin Vardimon, 1971년생)의 작품 『피노키오』가 무대에 올랐다(LG아트센터, 2019년 5월 18~19일). 카를로 콜로디의 동화 『피노키오의 모험』(1883)을 각색한 것으로 2016년 영국 켄트 인터내셔널 패밀리 페스티벌 ‘보잉’(Kent’s International Family Festival bOing!)에서 첫 선을 보인 후 프랑스, 스페인, 노르웨이 등을 거쳐 한국을 찾았다. 그녀가 이끄는 야스민 바르디몽 컴퍼니는 2009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해외초청작 『예스터데이(Yesterday)』로 처음 한국 무대에 섰고 이번이 두 번째다.
공연은 원작의 줄거리를 충실히 따라간다. 어둠 속에서 시작된 줄거리에 대한 내레이션은 마치 영혼이 속삭이는 것 같다. 검은 옷에 복면을 쓴 서너 명의 인물이 하얀 장갑을 끼고서 팬터마임으로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한다. 이때 나이 든 목수 제페토가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무대로 들어온다. 무대 오른편에 시계 속 목각인형들이 회전하듯 재깍재깍 소리에 맞추어 서로 손을 잡고 지지대가 되어 줄지어 움직인다. 그사이 제페토는 나무 조각을 들고 작업실로 들어가는데 나무 인형을 만드는 그의 동작은 그림자놀이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그가 작업실 밖으로 나오면서 우리는 짧은 머리와 작은 키의 앳된 피노키오를 만난다. 형광 노란색 옷을 입은 피노키오에게 푸른 반짝이옷을 입은 요정이 영혼을 불어넣는다. 피노키오는 두 다리로 일어서려 해도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는다. 부드럽고 서정적인 음악에 맞추어 흐느적거리며 춤을 춘다. 걷는 모습이 한 발은 바닥에 접혀 있고 다른 발은 발차기로 한껏 얼굴 앞까지 들어 올리는 아크로바틱한 동작을 취한다. 그는 아직은 나무 인형일 뿐이다. 관객들은 웃는다.
제페토가 피노키오의 책을 사기 위해 하나뿐인 외투를 파는 장면은 마임으로 표현된다. 행복한 미소를 짓는 제페토를 뒤로하고 책을 들고 교복을 연상시키는 줄무늬 넥타이를 단 피노키오는 등굣길에 사기꾼에게 홀려 놀이공원으로 간다. 이제 피노키오의 모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무대는 제페토의 작업실에서 천막을 친 서커스장으로 바뀐다. 조명의 다양한 색깔이 공간을 바꾼다. 피노키오는 줄로 움직이는 마리오네트 인형들과 어울려 춤을 춘다. 서커스의 조련사가 등장하고 그의 주문에 따라 마리오네트와 피노키오는 구르고 뛰고 팔을 휘젓고 바쁘게 움직인다. 조련사의 긴 팔(실은 여러 사람이 겹쳐 있는)은 지팡이를 짚고 녹음기를 틀며 피노키오를 주먹으로 갈긴다. 화들짝 놀라 겁에 질린 피노키오는 그래도 웃으면서 그의 지시에 따라 마리오네트와 함께 네 쌍이 되어 발레를 추듯 움직인다. 그 춤에 흡족해진 빨간 두건을 쓴 조련사는 피노키오에게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건넨다. 늦은 저녁 두 명의 사기꾼은 피노키오를 집이 아닌 술집으로 이끈다. 무대는 긴 줄에 매달린 세트로 순식간에 전환된다. 자판대와 탁자, 의자가 갖추어진 술집에서 빨간 모자를 쓴 종업원에 손님들이 왁자지껄하게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연출된다. 어린 피노키오는 구석에서 쭈그린 채 잠이 들고 그사이 제페토는 그를 찾아 이리저리 헤맨다. 깨어난 피노키오는 화를 내는 술집 주인에게 금화 한 냥을 내준다.
다시 요정이 등장하고 왜 이런 곳에 있느냐는 뜻으로 동작을 취하자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피노키오의 코(겹쳐진 사람들의 손이 이어져)가 길어진다. 피노키오는 제페토 할아버지에게 가겠다고 요정에게 약속한다.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찾아 배를 타고 바다에까지 간다. 풍랑이 불고 무대 위에는 제페토를 실은 작은 배 한 척이 공중에 떠 있고 커다란 파도가 비닐로 형상화되어 요란하게 나부낀다.
다시 무대에 선 피노키오. 집으로 가는 길에 사기꾼들에게 또 속아 금화를 모두 빼앗기고 친구들을 만나 어울리려고 하지만 그들은 피노키오를 따돌린다. 그들은 그를 가운데 세우고 밀치거나 그의 걸음걸이와 움직임을 따라 하며 조롱한다. 마지막에, 바다로 간 피노키오는 고래뱃속에서 나는 기침소리를 따라 갔다가 제페토 할아버지를 만난다. 제페토는 고래뱃속에서 닻을 뜯어 불을 지폈고 피노키오를 꼬옥 끌어안는다. 제페토의 소원으로 피노키오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인간 소년으로 거듭난다. 다시 오른편에 시계 속 목각인형들이 회전하듯 재깍재깍 소리에 맞추어 서로 손을 잡고 지지대가 되어 줄지어 움직이며 공연은 끝난다.
야스민 바르디몽의 『피노키오』는 피노키오의 코, 조련사의 긴 팔을 무용수들이 겹치는 동작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마리오네트, 그림자놀이, 시계 태엽 감긴 목각인형과 피노키오의 정형화된 움직임으로 동화가 지니는 환상성을 무대 위에 재현해놓았다. 또한 피노키오 의상(교복을 형상화한) 중 줄무늬 넥타이, 술집 종업원의 빨간 모자 등의 원색의 색감은 무대를 화려하게 만들었다. 제페토의 작업실과 서커스장을 비추는 조명으로 또 무대 위 긴 줄에 매달린 세트로 장면 전환 시간을 최소화했다. 이처럼 다채로운 신체극(physical theatre) 차용, 영리한 성격 묘사, 혁신적인 기술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총체예술로서 관객을 즐겁게 하는 한편 피노키오를 향한 제페토의 사랑과 사람들 사이에 함께 어울리고 싶어 하는 피노키오의 간절함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안무가 야스민 바르디몽은 여러 안무작들 사이에서 독특하게 동화 『피노키오』를 무용극화했다. 이처럼 동화 또는 옛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신데렐라』(1999), 앙줄랭 프렐조카주의 『스노우 화이트』(2008)를 떠올릴 수 있다. 이는 모던 발레 작품이지만 춤이라는 큰 틀에서 말할 수 있겠는데, 왜 동화인가? 하는 것이다. 동화에는 수많은 인간 유형이 등장하고 삶을 살아가는 여러 가지 방식이 표현되어 있다. 어떻게 무대화하느냐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많다. 이번 작품 『피노키오』는 원작 『피노키오의 모험』을 서커스장 풍경을 중심으로 흥겹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면에서는 시각적인 점에 치우쳤다고도 볼 수 있겠다.
야스민 바르디몽은 키부츠 댄스 컴퍼니에서 5년 동안 활동했으며 1995년 영국문화원 ‘온 더 웨이 투 런던’ 안무가상을 받은 뒤 1997년 영국에 정착해 이듬해 자신의 이름을 딴 컴퍼니를 창단한다. 지금까지 『테트(Tête)』(1999), 『루어 루어 루어(Lure lure lure)』(2000), 『티클리시(Ticklish)』(2001), 『자장가(Lullaby)』(2003), 『공원(Park)』(2005), 『유스티티아(Justitia)』(2007)를 발표했으며 이 작품들의 하이라이트를 모아 만든 작품이 창단 10주년 기념작 『예스터데이(Yesterday)』다. 이후 『7734』(2010), 『자유(Freedom)』(2012), 『미로(Maze)』(2015), 『메두사(Medusa)』(2018) 등을 발표했다. 바르디몽은 2006년 이래로 새들러스 웰즈(Sadler’s Wells)의 협력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4년 터너 컨템포러리와의 공동 작업으로 영국예술위원회 특별상(Arts Council England’s Exceptional Award)을 수상하는 등 현재 영국의 현대무용을 대표하는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다.
넛크러셔(Nutcrusher)
야스민 바르디몽과 같이 자국에서보다 해외에서 주로 활동하는 한국의 현대무용가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인 안무가 허성임이 국내 무대에 작품을 올렸다. 그녀는 2004년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P.A.R.T.S.(Performing Arts Research and Training Studios:공연예술 연구 및 훈련 스튜디오) 컨템포러리 댄스 스쿨에서 공부한 이래로 브뤼셀을 비롯하여 파리, 런던, 취리히 등 14년간 유럽에서 활동해오고 있다.
『넛크러셔(Nutcrusher)』는 지난해 11월 말 ‘2018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9편 중 한 편으로 선정되어 2019년 1월 18~20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 올랐다. 필자는 두 번의 공연을 모두 관람했다.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인데 무대에는 세 명의 춤꾼이 등장해 있다. 옌칭린(Yen Ching Lin), 마사 파사코폴루(Martha Pasakopoulou), 허성임이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가린 그들은 관객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을 기어 다니기도 하고 한쪽 다리를 삐딱하게 한 손으로 누른 채 서 있기도 했다. 이어 검은 복면과 검은 옷을 벗어버리자 화려한 금색, 분홍색, 파란색의 반짝이는 바지가 드러난다. 상반신은 앞치마로 반쯤 가린 춤꾼들은 뒷짐을 진 채 엉덩이를 힘차게 씰룩거린다. 찰랑거리는 머릿결과 엉덩이만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러한 움직임은 춤이 아니라 운동 같다. 뒷짐을 진 채로 좌우로, 앞뒤로, 직렬로, 횡렬로, 교차로 ‘엉덩이 씰룩거리기’는 멈추지 않았다. 춤꾼들은 중간에 한 번 한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포즈를 취한다. 앞모습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도 그들의 움직임은 반복되었다. 잘록한 허리, 빵빵한 엉덩이. 그것이 TV 광고나 잡지에서 보이는 여성성의 한 단면임을 안무자는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그 섹슈얼한 이미지를 실컷 보라고도 하는 것 같다.
하얀색 비닐 배경막을 제외하고 다른 세트가 없는 하얀색 무대에서 그녀들은 원색의 컬러를 입고 쉴 틈 없이 움직인다. 뛰고 걷고 머리를 위아래로 흔드는 헤드뱅잉을 하고 기어 다니고 앞치마를 풀어헤친다. 벗은 등이 보인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같은 동작을 동시에 행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동작을 행하기도 하면서 무대를 온통 휘저었다. 거기에 잘록한 허리, 빵빵한 엉덩이는 보이지 않는다. 무한적인 움직임으로 그들의 호흡은 턱까지 차오른다.
그녀들은 왜 이렇게 움직이는 걸까. 그 움직임에는 흥겨움도 상쾌함도 없다. 그들은 다만 땀범벅을 이루며 무대 전체를 움직일 뿐이다. 춤꾼도 관객도 힘들고 고통스러울 지경이다. 그런데 지쳐도 계속해서 움직이는 이 행위가 어느 순간 저항처럼 다가왔다. 이 힘든 상황이 언제 끝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도 그들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마치 전선에 선 여성 전사 같다. 마침내 모든 힘을 다 쏟아낸 그들은 지쳐서 쓰러졌고 서로가 몸을 겹치며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다.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안무가 허성임은 여성의 신체화, 신체의 대상화 그리고 몸이 조작되는 여러 각도를 보여준다고 하였다. 구조적 힘의 역동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저항하며 파괴되고 해체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여정을 그렸다고 밝혔다. 춤꾼들의 움직임은 여성이 대상화되고 섹슈얼한 존재로 인식되어온 것에 대한 항거의 몸짓이었을까.
공연 시간 약 60분 중 전반이 무대 중심에서 움직임이 이루어졌다면 후반은 거기서 벗어나 무대 전체를 돌면서 이루어졌고 갈수록 움직임은 과격해지고 격렬해졌다. 찰랑이는 머리칼, 드러난 등의 라인, 엉덩이의 곡선, 엉덩이 씰룩거리기가 ‘보는, 보이는’ 몸이었다면 그 뒤에 이어진 뛰고 걷고 헤드뱅잉을 하는 것은 ‘보여주는’ 몸이라고도 받아들여진다. 즉 여성 스스로의 움직임인 것이다. 거의 끝날 무렵 이들 세 명의 개별적인 움직임은 치밀하게 계산된 듯 딱 맞아떨어졌다. 『넛크러셔』는 부제인 ‘여성의 몸, 보다, 보이다, 보여주다’가 말하는 대로 여성의 몸을 보는 자와 보여주는 자의 관계를 잘 짚어주었으며 사회적으로 여성이 겪는 삶 그리고 고정된 시선 속에서 여성이 갖는 고민과 저항, 대치를 효과적으로 보여준 작품이었다.
제목에서 이미 작품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문 제목에서 nut는 암나사이고 crusher는 분쇄기이다. 너트는 종종 여성으로도 상징된다. 그래서 제목 ‘Nutcrusher’는 사람들의 눈에 (여성 자신이 원하지 않았으나) 보이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오도되어온) 여성성의 한 단면을 부숴버리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여성의 대상화 측면에서 허성임은 끝내 춤꾼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쪽으로 안무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작품 소개 영상에서 그녀는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
“나의 목표는 컨템포러리 댄스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컨템포러리 퍼포먼스를 몸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만드는 것이다. 이때 몸은 성별도 없고 무대 위에서 소통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라고 허성임은 말했는데 그러한 안무 철학이 이 작품에서도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넛크러셔』는 올해 12월 니드컴퍼니가 주관하는 페스티벌인 디셈버 댄스(December Dance)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다.
앞에서 짧게 언급한 대로 허성임은 얀 파브르/트루블렌(Jan Fabre/Troubleyn), 알리아스 컴퍼니(스위스), 세 드 라 베 발레단(벨기에), 니드컴퍼니(벨기에, 2009년~) 등 여러 컴퍼니에서 활동했으며 니드컴퍼니에서 조안무를 거쳐 안무가로서 데뷔한 그녀는 데뷔작 『엔트런스, 인—트랜스(Enstrance, In—trans)』(2013)를 비롯해, 『튜닝(Tuning)』(한국 초연, 2014년), 『필리아(Philia)』(한국 초연, 2013—장수미 공동안무), 『님프(Nymf)』(2015)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님프』에서 만삭의 몸으로 무대에 오른 그녀는 이 작품으로 2015년 춤비평가협회 베스트상을 받았다.
최근 허성임은 2015년 파독 광부 이야기를 다룬 『You Are Okay!』가 NRW 문화사업국이 주관한 NRW 무용연구 #17(Tanzrecherche NRW #17)에 선정되어(일러스트레이터 이소망과 공동) 2017년 10월 솔로 탄츠 페스티벌의 일부로 본에서 초연했다. 2016년에는 영국으로 주거지를 옮긴 뒤 2017년에는 『휴먼 월(Human Wal)l』로 영국 베드포드셔 대학교과 루톤예술위원회가 공동 후원하는 중견 아티스트 지원 프로그램인 테스트베드 카탈리스트 프로그램(Testbeds Catalyst programme)에 선정되었다.
이스라엘의 야스민 바르디몽과 한국의 허성임은 자국이 아닌 타국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현대무용가들이다. 허성임 경우는 춤꾼도 그렇지만 드라마투르그(필립 스테이너)나 조명(파트리샤 롤랑 폴로), 음악(제임스 해밀턴) 등 외국인 스태프들과 작업하고 있다. 두 안무가들은 여성과 아이들,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신체성을 이용해 강렬하게 춤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 어떤 지역(나라)에서 활동하느냐보다 어떤 춤작품을 만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가 되고 있는 것이다.
출처_이찬주, <신체성을 강조한 두 컨템포러리 작품>, 《공연과 리뷰》 104호(201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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