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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이찬주
Subject   모던댄스와 모던발레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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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모던댄스와 모던발레 이찬주p 120-134 춤-all that dance 2005년 재판 이브출판
19c 시기는 곡예와 줄타기가 토슈즈를 신은 무용수들과 함께 무대에 올려질 정도로 예술적 인식에 결여되어 있던 시기로서 발레 예술계는 예술적 창조의욕이 바닥에 다다른 상태였다. 이 때 스스로를 진정한 예술가로 지각하고 새로운 형식의 무용을 시도한 이사도라 던컨, 로이 풀러, 루스 세이트 데니스를 현대무용의 1세대로 보고 있다.
먼저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1878~1927)은 춤의 근원으로서 모든 움직임의
자유로움과 내적인 표현의 완성으로 여성의 열망과 해방을 춤으로 보여주고자 하였다. 춤의 근원으로서 모든 움직임의 연유를 내적인 충동에서 구하였고 바람, 파도 등 자연 현상 속에서 움직임의 소재를 찾아왔다. 그녀는 기존의 코르셋과 같은 복장을 거부하고 고대 그리스의 남녀공용 의복인 튜닉을 착용하고 맨발로 춤을 추었으며 그의 춤에 등장하는 다른 춤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이러한 춤 형식을 ‘맨발의 춤’이라고 불렀는데 그녀의 춤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이러한 이사도라 던컨의 특징은 당시 슐리만이 고대 문명을 발전함에 따라 상상속의 고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사람들의 호기심이 증폭되면서 관객들에게 이전까지의 공연형식과 다른 독특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으며 헬레니즘적인 그녀의 춤은 그 이후의 무용가들은 물론 발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던컨이 끼친 영향은 먼저 무용수들을 코르셋과 토슈즈로부터 해방 시켰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서 여성 무용수들은 발레가 추구하는 무용수들의 이상을 벗어나는 개성 있는 다양한 움직임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남성무용수들 역시 여성무용수를 받치는 지렛대 역할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춤을 추도록 요구받게 되었다. 또한 단순한 의상에서의 해방만이 아닌 움직임의 무한한 자유를 경험하게 한 것 역시 그녀의 공헌 이었다. 그녀는 의상, 무대, 장치 등의 요소를 가장 단순화 시키는 가운데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공연을 했으며 그것은 무용수들을 혹사시키는 턴 아웃 동작이 아니어도 가능하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 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음악에 있어서도 당시까지 춤 반주곡만을 사용하던 형식에서 벗어나 예술적으로 완성도 높은 음악을 사용 하였다. 자신의 작품은 예술적으로 매우 뛰어난 것이므로 당연히 가장 훌륭한 음악에 맞춰서 추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춤 반주곡을 단지 열등한 장르라고 치부하여 연주회용의 음악을 춤 반주용의 수준낮은 목적으로 이용 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이후의 무용가들에게 다양한 음악을 사용할 수 있게 하였고 그리하여 훌륭한 음악성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공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공연은 포킨이 안무한 <<빈사의 백조>>(1905)의 리싸이틀 형식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녀의 용감한 삶 자체가 그 시대의 여성상, 성적 주체성 향상의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전 유럽에서 춤을 추었으며 그녀의 춤은 발레뤼스(Ballets Russes)의 위대한 전통을 낳게 하는 초석이 되기도 하였다. 1927년 교통사고로 죽은 뒤에 6명의 제자들에 의해 그녀의 춤은 전수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들을 ‘이사도라블르들’이라고 불렀다. 제자들은 그녀의 춤뿐만 아니라 정신을 계승코자 하였고 그녀의 기법은 현재까지도 계승되고 있다.

19세기말을 빛낸 화려한 춤꾼 중의 하나로 로이 플러(Loie Fuller 1862~1928)를 들 수가 있다.
로이 플러는 흔히 ‘빛의 마술사’로 불린다. 그녀는 당시에 겨우 실용화되던 전기조명, 채색 셀룰로이드, 환등기, 그 외 무대 공학상의 다른 기자재를 가지고 끊임없이 실험 하였다. 여러 조명 장치를 자신이 휘두르는 긴 치맛자락에 비치게 하여 얻는 효과로 유명한 그녀는 아르누보의 장식적 성향에 적합 하였다. 또한 여러 장의 거울을 특수하게 배열한 것을 고안하여 특허로 하였고 천에 들이는 염료를 손수 조제 하였다. 그녀의 주요 발명품 중 하나가 아래에서 비추는 조명법으로서 밑에서 위로 투사된 조명을 받은 불투명 유리창 위에서 연기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불의 춤 Fire Dance>(1895)에서 사용 되었는데 화가 툴루즈-로트레크는 이 작품에 매료되어 석판화로 옮기기도 하였다.
그녀는 전기 작업을 무대 위에서 보여주고자 하였는데 마침 라디움을 발견한 퀴리 부부의 작업을 그대로 무대 위로 옮겨와 무대를 전기 빛의 바다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동안의 전기 작업의 산물을 ‘라디움 댄스(Radium Dance)’에서 보여주었는데 그들 부부에 대한 감사로 ‘라디움 댄스(Radium Dance)’의 의상을 그들에게 헌정하였다. 당시 다른 이들이 생각지도 못한 전기를 무대위로 끌어들임으로써 다양하고 활발한 움직임을 이룩한 것이다. 신체의 움직임보다는 빛과 그 조작을 통해 움직임의 완성을 이루고자 하였으며 그녀의 이러한 작업은 단순한 춤 예술가로서만이 아니라 그 시대정신과 과학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플러의 춤이 드러내는 극적효과는 시각적 효과에서 기인한 것으로 파리에서 플러는 파리 청중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아 ‘라 로이 (La Loie)’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4년 루스 세인트 데니스는 <로이에게 드리는 왈츠>라는 이인무를 통해서 플러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이외에도 플러의 작품으로<뱀의 춤> <버터 플라이>등이 있다.

로이 플러와 함께 이 시대를 대표하는 춤꾼으로 루스 세인트 데니스(Ruth Saint Denis 1877~1968)는 또 다른 현대 춤의 길을 제시하며 발레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 방법으로 그녀는 동양적 전통과 세계관으로 우주의 신비를 표현하려 하였다. 그녀는 몸짓과 움직임을 분석하는 델사르트의 체계를 수련하였으며 발레와 스페인 춤을 공부하여 보다 전통적인 양식으로 공연하고자 하였다. 무대와 의상에 대한 뛰어난 감각으로 상업적으로도 성공하였고 관객들은 그녀의 춤에 열광하였다. 1906년 유럽으로 발길을 옮긴 그녀는 많은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찬사를 받게 된다. 그 가운데 인도의 거리 무희를 연상시키는 ‘무희의 춤(The nautch, 1908)’이라는 작품은 팔과 머리의 동작을 보다 율동적으로 활용하였다.
루스 세인트 데니스는 플러나 던컨과 달리 미국 안에서 본격적으로 현대무용을 개척한 사람이다. 이집트 여신의 상표 담배 광고에 거재된 수수께끼 같은 여신의 이미지가 데니스에게 춤의 소재로서 신비스런 동양을 탐험하도록 자극 하였다고 한다. <라다 Radha>(1906)에서 데니스가 보여진 유연한 큰 신과 황홀한 소용돌이 회전은 당시 관객들에게 말할 수 없이 이국적으로 보였다. 데니스가 만든 인도 춤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나긋나긋한 팔놀림으로 유명했던 <분향>과 몸부림치며 돌진하는 뱀의 모습을 팔로 묘사한 <코브라>도 있다. 후에 파트너이자 남편이 된 테드 숀과 함께 데니쇼운 학교를 세워 현대무용의 보급 활동을 전개 하였다.
1914년, 파트너이자 남편인 테드 쇼운(1891~1973)과 세운 ‘데니쇼운(Denishawn)’은 미국 현대 무용의 요람으로서 100여명의 학생을 훈련시키고 미국 전역에 1,000여 회의 공연을 추진하게 된다. 이것은 이전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교육과 공연을 병행하는 그리고 훈련된 현대 춤의 춤꾼과 안무가들의 저변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데니쇼운의 교과과정은 발레, 스페인 춤, 동양 춤, 종족 춤과 민속 춤, 달크로즈의 유리드믹스, 델사르트의 제스처 등 매우 광범위하였다. 여기에다 후에는 교과과정으로 무용사와 철학을 보강하였다. 데니스는 이전의 동양적 춤을 고수하였으며 쇼운은 민족적 취향의 춤을 그 소재로 삼기도 하였다. 그들 부부의 이혼으로 인해 무용단의 활동을 마감하였으며 무용단 출신인 그레이엄과, 험프리 그리고 와이드맨 등을 비롯한 사람들에 의해 다음세대 춤꾼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의 공연경험은 미국 춤의 큰 흔적을 남기게 된다. 이후에 데니스는 춤과 종교의 만남에 열중하였고 쇼운은 남성무용단(The shawn and his men dancers)을 구성하여 힘과 왕성한 기력이 강조된 보다 남성적인 춤을 보여 주었다. 작품으로는 1934년 ‘노동 교향악’, 1935년 ‘운동예술의 몰파이’ 등이 있다. 보다 다양하고 새로움으로서 춤의 지평을 넓힌 데니스와 쇼운의 작업은 그 후에 마사 그래함과 도리스 험프리(Doris Humphrey 1895~1958)가 세운 새로운 현대 춤 전통의 원류였다. 비록 비판의 대상으로 예술가들의 지적이 있었지만 그들의 작업이 없었다면 오늘날 미국 현대 춤의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데니쇼운 스쿨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다음 세대의 무용가들에게 철저한 훈련을 통하여 광범위하고 다양한 양식을 섭취하게 했다는 점이다. 또한 이국적이고 무절제한 미적세계를 제공하기도 하는 한편 지속적으로 전문적인 공연경험을 접하게 했다. 1930년대 초 데니쇼운 스쿨이 해체되면서 현대무용의 중심점은 그곳에서 교육받은 다음 세대의 무용가들에게 자연스레 옮겨졌다.

마사 그레이엄, 도리스 험프리, 그리고 독일의 마리 뷔그만은 현대무용의 제 2세대로서 독특한 그들만의 스타일로 현대무용의 수준을 예술적으로 끌어올렸다.
대표적으로 마리 뷔그만은 억압된 표현주의 춤으로 극장에서나 실생활에서 어려운 소재들인 인간의 어두운 측면들을 주로 다룬다. 작품으로 ‘밤의 얼굴’, ‘묘비’, ‘운명의 노래’ 등이 있다. 주된 테마로서 죄악과 과오로서의 신경증을 표현한다.
마사 그레이엄과 도리스 험프리는 인공적인 기교위주의 전통발레와 데니숀식 춤의 잔재를 일소하기 위해 각자 움직임의 근본원리를 모색 하였다.
마사 그레이엄의 ‘수축과 이완’(contruction and release) 기법은 호흡의 밀물과 썰물에 따라 몸통의 움직임을 더 자유롭게 허용하는 것으로 중력과의 싸움으로 그 움직임의 효과는 더 극대화 되었다. 또한 도리스 험프리는 ‘낙하와 회복’(fall and recovery) 이라는 기법으로 움직임을 개발했는데 이는 모든 움직임을 균형과 불균형, 떨어지는 것이거나 아니면 추락한 상태에서 회복으로 향하는 과도적인 순간에 존재한다고 본 것 이다. 중력과의 관계에 있어서 험프리는 그레이엄처럼 투쟁적이지 않았는데 이는 그레이엄이 지표면에서 떨어지지 않고 쿵쿵거리며 바닥을 치는 발스텝을 사용한 반면 가볍게 지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스텝을 사용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마사 그레이엄이 지극히 개인적인 움직임 스타일로 현대무용을 보다 대중적인 관객들에게 인기 있는 것으로 만들었음에 비해 험프리는 1920, 1930년대의 혁신적 사상들을 반영하는 실용적인 움직임 어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험프리는 그레이엄처럼 자신의 재능과 테크닉을 선보이는 쇼케이스식의 공연을 하지 않고 자신의 개념과 생각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형식으로 군무를 중심적으로 연구하여 안무늘력을 인정받았다. 마사 그레이엄의 대표작으로는 <마음의 동굴> <애팔레치아의 봄> <클렘 네스트라>등이 있다. 도리스 험프리의 안무이론에 관한 책 <무용 창작 기법>은 현재까지 쓰인 안무법에 관한 가장 훌륭한 책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의 움직임 원리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초기 현대 무용의 움직임 탐색작업에서 개인적 스타일을 구축하는 예가 되었고 이로부터 무한하고 다양한 움직임 시각이 탄생 하였다. 이후 현대무용에서는 발레의 가장된 평정과 여유, 우아함으로 무용수를 가리기보다 공연자를 자신만의 개성적인 특질로 드러내게 되었으며 발레단의 전제적 서열을 따르지 않음에 따라 무용수들은 서로 평등하고 민주주의적인 관계로 변화 하였다. 또한 미국 태생의 던컨이 유럽에서 현대무용이라는 새로운 무용양식을 태동시킨 뒤, 그 후 미국과 독일에서 그녀의 무용사상과 스타일의 추종자들이 활발히 활동하게 되어 미국과 독일은 현대무용 발달의 중심지가 되었다.
라반(Rudilf von Laban 1879~1958)은 이른바 ‘표현 춤’을 내세워 춤의 영역을 넓혔으며 춤의 중요성을 증대하였다(레크레이션, 교육, 치료요법). 또한 그는 라바노테이션(Lavanotation)이라는 무보체계의 창안자이다. 마리 뷔그만(Mary Wigman 1886~1959)은 󰡔춤의 언어󰡕에서 “라반과의 만남은 예술적 성취를 향한 걸음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춤의 무보체계의 완성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이다.
덩컨, 세인트, 쇼운, 뷔그만(1886~1959) 그리고 여타의 춤 예술가들은 다른 대안들이 충분히 가능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실험은 끝났고, 많은 변화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앞에서 거론된 개혁자들의 작업은 춤 예술에서 일어날 새로운 방향들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젊은 춤 예술가 미셀 포킨(Michel Fokine 1880~1942)은 1905년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a 1881~1931)의 ‘빈사의 백조(The Dying Swan)’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리싸이틀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이것은 이제는 낡은 것에 대한 응답으로 20세기에 생겨난 새로운 형태의 발레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신(新) 발레로 19세기 발레 아카데미에 미치는 유해한 영향에 적절한 메타포를 제공한다. 19세기 발레의 유력했던 상징이 죽음을 맞이했던 것을 포킨은 20세기 신(新) 발레의 특징인 예술적 퇴폐(De Ca Dence)의 분위기를 생상(Saint saens)의 백조로 응축시켜 놓았다. 현대 춤과 발레의 접목을 엿볼 수 있다.
포킨이 주장한 춤의 개혁은 디아길레프(Serge Diaghilev 1872~1929)에 의해 지지되었다. 공연의 기획자로서 뛰어난 감각을 지닌 디아길레프와 그의 단체 ‘발레뤼스(Ballets Russes)’에 의해 발레의 중흥은 약진을 거듭 하였고 보다 대중적, 예술적이 되었다. 이 때부터 발레공연의 중심으로 파리의 위치가 확고해졌으며 전 유럽은 ‘발레뤼스’의 공연을 통해 고전발레의 예술성에 감탄하게 된다. 하지만 ‘발레뤼스’의 활동도 디아길레프의 사망과 함께 막을 내리고 고전발레는 정점을 지나 이미 퇴조의 빛을 보이고 있었다. ‘발레뤼스’의 해체 이 후 각지로 흩어진 그 출신의 많은 춤 예술가들에 의해 보다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안무와 교습이 행해지게 된다.
디아길레프의 “나를 놀라게 해!”(surprise me!)는 그 시대의 표어가 되었는데, 예술가들이 자기 시대에 대한 새로운 표현을 찾는 영원한 열광적 유행을 가장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때가 바로 예술에서 오랜 기간 동안의 실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시기이다. 디아길레프는 그가 콕토를 “나를 놀라게 해!”라는 구호로 나무랐을 때 그 순간의 역사의 신호를 올바르게 읽은 것이다. 종종 이것은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이나 “예술을 위한 충격”으로 해석되었다. 러시아의 상류층에서 태어난 세르게이는 예술계에서 명성을 날리려는 욕망을 가졌다. 그는 법대를 중퇴하고 작곡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디아길레프는 그 후와 시 분야의 동향이었다. 그는 러시아 왕립 극장에 고용되어 몇 편의 작품을 감독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원만하지 못하여 적을 쉽게 만들었고 결국 위계질서에서 쫓겨났다. 잠시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자택과 파리에서 최신 러시아 그림들을 전시하기로 하였다. 그러다 그는 결국 발레 흥행 제작가로서 자신의 에너지, 경영 능력, 그리고 흥미롭고 새로운 예술품에 대한 열정의 방출구를 찾아냈다.
처음에는 러시아 발레를 파리에 선보이는 것(알렉산드르 브누아가 제시한)이 목적이었다. 원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이 발레를 러시아에 도입하였지만 그 당시 이 예술 형식은 서유럽에서는 매우 부실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디아길레프의 공연들은 1909년 5월의 첫 공연부터 인기를 끌었다. 디아길레프가 음악, 회화, 그리고 시를 거쳐 발레계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이런 측면들이 실제 춤 동작보다 더 강조된 작품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지 않았다. 조앤카스 김말복역 역사속의 춤p.212 - 여흥의 실험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목신(牧神)역으로의 Nijinsky였다. 지금까지 그의 고상하고 뛰어난 기술적 묘기에 대해서 나왔던 갈채에 반해서 그의 예술적 기교의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고 그저 강렬한 지진이나 도발적인 움직임 또는 경직된 발걸음이나 바위 위에 꾸부정하게 서 있는 것과 같은 것만 보여주었다.
이런 안무는 대담하고 육감적인 조망과 채색에 의해서 Paris에서 일어난 Baskt의 화려하고 인상주의적인 무대장치와는 이상한 비교를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청년기의 성의식의 출현에 대한 축하는 결코 무대에는 제시하지 않았었던 색정적인 행동에 의해서 결정에 달하게 되었다. Diaghilev를 만족하게 했던 Celebre라는 말은 출판이 보장되었고, Auguste Rodin 과 같은 예술가들은 그 발레를 옹호한 반면 Le Figaro는 외설적인 장면이라고 비난했다. 그때부터 오리지널 L󰡑Apres-Midi d󰡑un Faune은 거의 공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논박적인 성격이 안무의 고귀성을 묵살했기 때문이다. Nijinsky자신을 제외하고도 몇몇 작품 해석가들은 효과있게 반신반인을 묘사하는데 성공했지만, David Lichin, Andre Eglevsky, Igor Youskevitch, Rudolf Nureyev, 그리고 George de la Pera는 주문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예술적 고귀성에 감탄을 했다.
대중들의 말에 의하면 Diaghilev의 “정확히 내가 원했던 것이다!”라는 말이 추문이 되어 봄의 제전은 여섯 번의 공연을 마치고 사라지게 되었고, 그후 곧 Nijinsky는 「the Ballets Resses」에 더 이상 남아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발레 조승미

Nijinsky의 정돈된 혼란의 극적 장면과 경련을 일으키는 “turned - in"위치를 잃었다. 니진스키의 뒤를 이어 마신이 재안무를 맡아 1920년 파리에서 같은 발레루스에 의해 공연되었는데, 그의 안무 역시 니진스키의 것 못지않게 원시적은 영기(靈汽)로 가득 차 있고, 완전히 자유로운 움직임의 형태를 취했으나 어쨌든 「봄의 제전」은 관객에게 충격과 흥분을 안겨주었다. 파리와 런던에서 8회 공연된 이후 디아길레프와 니진스키가 결별한 이유도 있고 해서 이 작품은 오랫동안 레퍼토리에서 제외되었다가, 이 작품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보관하고 있던 디아길레프가 1920년에 「봄의 제전」을 부활시킨다. 이때에는 니진스키의 안무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 혹은 기억하고는 있지만 그 누구도 이를 추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 레오나드 마신이 새롭게 안무를 했다. 그는 니진스키의 안무를 본 적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 다시 파리의 샹델리제극장에서 「봄의 제전」이 부활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 니진스키의 「봄의 제전」은 죽었지만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영생을 얻게 되었다. 니진스키의 안무처럼 ‘그로테스크’ 하지는 못했다
1913년 발레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 영어 제목 이 야기된 격정이 훨씬 크다. 그 초연으로 인해 발생된 스캔들은 용기 있는 전위예술가들 대 아둔한 속물이 벌이는 모든 전투의 귀감이었고, 초연 장에서 지지자들과 공격자들이 공공연히 싸운 소동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웃음과 고함, 휘파람소리와 밀쳐대는 와중에서 누군가가 라벨이라고 불렀던 객석에 있던 그를 옆에 있던 멋지게 차려입은 여자가 ‘더러운 유태인’이라며 따귀를 갈겼고, 각양각색의 재잘대는 말 많은 이들은 이 발레를 ‘봄의 대학살(Le Massacre du printemps)’로 제목을 바꿔버렸다. 어떤 이들은 의사와 치과의사를 부르기도 했다는 가장 유명하면서 악명 높은 작품이었다. 관객들의 야유, 조소, 비난, 괴성이 지나치자, 디아길레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관객을 향해 소리쳤다고 한다. “제발 부탁합니다. 이 공연을 끝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봄의 제전>은 춤단의 존속 기간 중 오직 6회의 공연을 가졌을 뿐이다 육완순,『서양춤인물사』금광,1987, p.115

그리고 이것은 또 한명의 선택된 처녀, 한 발가락 위로 굳건히 밸런스를 취하고 네 명의 구혼자 - 그녀의 손끝에 있는 전 세계 - 에게 우아하게 손을 뻗치던 특권을 부여받은 귀여운 오로라가 있은 지 고작 23년 후였다.
니진스키의 제전은 단지 13회 공연을 가졌지만 스트라빈스키 곡은 안무가들로부터 계속해서 성스러운 교본의 위치를 얻었다. 상당수의 많은 춤꾼들이 이 곡에 맞춰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는 한 여자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몰리사 펜리의 솔로 작품이 1988년에 만들어졌고, 원곡을 펑크 락과 병치시켰으며 두드러지게 놀랍도록 사나운 동작이 스트라빈스키에게 현대 락 음악의 긴급성과 관행을 주었던 마이클 클라크의 믐(Mmm,1992)도 있다. 쥬디맥크럴 1998, 66


디아길레프의 ‘안무자나무’라는 캐리커쳐에 유일한 여성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Bronislava Nijinska)가 있다. 디아길레프는 대중적인 단막발레「오로라의 결혼식(Aurora's Wedding)1922」에서 그녀를 건져 올리는 커다란 성과를 이루었다.
예술계의 대단한 눈빛의 소유자인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가 그녀의 재능을 몰라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 그녀는 발레뤼스에서 안무자로서 포킨, 니진스키, 마신에 이어 1922년부터 무려7개의 작품 안무를 연속적으로 맡았다. 니진스카의 양친은 둘 다 폴란드 출신으로 바르샤바의 유명한 비옐키 극장부설학교 발레스쿨에서 춤꾼업을 했고 비옐키 극장(Wielki Theatre)의 춤꾼로 활약했다. 특히 아버지인 토마스니진스키(Thomas)는 발롱(ballon, 도약하는 동안에 공중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동작)에 비상한 재능이 있었다.
니진스카의 부친 토마스 니진스키(1862년생)와 모친 엘레오노라(1856년생)는 함께 춤추며 사랑했기에 1884년 5월 코카서스의 바쿠에서 결혼했다. 결혼한 2년뒤 장남 스타니슬라프(애칭:스타시크)가 태어났고 다음엔 바슬라프 니진스키(바샤1889)가 태어났다. 니진스카가 춤출 수밖에 없었고 예술가로서 재능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녀의 탄생부터였다. 크리스마스때 민스크의 오페라 극장과의 계약 때문에 세 번째 아기를 가진 것을 숨기고 있었던 어느날 저녁 글린카의 오페라 <짜르를 위한 삶>속에서 춤추고 있었던 니진스카의 어머니 엘레오노라는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음을 느꼈다. 대역이 나머지 춤을 계속 해서 추게 되었고 마지막 막이 내렸을 즈음 심부름꾼이 달려와서 토마스 니진스키에게 아기의 소식을 알렸다. 그는 흥분해서 모든 단원들을 무대로 불러 딸의 탄생을 말하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녀의 부모가 민스크의 오페라극장의 무대 위에서 함께 춤춘 뒤 1시간만에 사랑받는 막내딸 니진스카(브로니아1891)가 태어났다. 니진스카 가(家)의 자녀들의 생일은 대부분 전기 속에서 혼란의 쟁점이 되었다. 니진스키(Vaslav Nijinsky, 1889~1950)의 부인이었던 로몰라의 최초의 니진스키의 전기에 의하면 니진스카는 1892년이 되기도 하고 리처드 버클이 이전의 오류를 시정한다고 하면서 1890년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의 발레사가 베라 크라소프스카야는 올바른 날짜를 제시하고 있고 지금은 세 남매의 생일에 대한 오류는 사라졌고, 니진스카는 1891년 1월 8일 저녁 공연 도중에 태어나게 됐다. 니진스카는 오빠인 니진스키가 디아길레프에게 해고당한 1914년 직후 남편 알렉산데르 코체토프스키와 더불어 발레뤼스를 떠나 어린 딸 이리나를 데리고 러시아로 가 버렸다. 1914년과 1919년 사이에 그녀는 발레교습과 안무를 하는 한편 안무에 관한 짧은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발레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안무가라 할 니진스카는 춤꾼로서 오빠에 필적할 재능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니진스카의 유언으로 사후 10년이 되기 전에는 출판하지 말라고 하여 1981년에 나온 그녀의 <회고록>이 춤문학의 이정표 격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을 만큼 글 솜씨도 뛰어났다. 니진스키가 정신병원에 있을 무렵 1920년대 발레뤼스에서 그녀의 오빠가 안무한 발레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 졌을 때 무척 마음 아파하던 니진스카는 예술적 목표와 방향을 모색해 왔었다. 또한 발레 기술에 미치는 귀중한 의미를 의식적으로 탐구하는 작품들도 있는데, 한 예로 니진스카의 「곤경(Les Facheux)1924」을 들을 수가 있다. 이것은 보리스 코첼노(Boris Kochno)가 몰리에르의 1661년 코미디 발레(Comedie Ballet)를 모방하여 대본을 썼으며, 음악은 아우 리(Au Ric), 디자인은 조지 브라크가 맡았다. 또 다른 예로 니진스카의「목자의 유혹(Les Tentations de la bergere)1924」에서는 양치기와 양치기 여인이 결혼을 하는데 춤꾼들이 파드뒤를 추며 축복해주는 것으로 이때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와 결혼의 신인 히멘이 잠깐이기는 하지만 18세기 시대의 무거운 의상을 입고 공연을 한다. 여기서 태양의 왕인 루이 14세를 대표하는 인물도 나타나며 음악은 몬텔리(Montelair), 디자인은 쟌 그리스(Juan Gris)가 맡았다. 이것은 둘 다 음악과 디자인에서 바로크 오리지널을 참고로 했다.「결혼」에 이어 현대생활을 소재로 하며 젊은 여성들에 대한 애칭을 의미하는 불어 단어인「암사슴들1924」에서는 상류사회에서의 초대되는 파티를 묘사한다. 여기 나오는 인물들 중에는 서로의 관심을 끌어내려는 두 젊은 숙녀와 그리고 푸른색의 짧은 벨벳튜닉과 흰 장갑을 끼고 운동선수와 듀엣을 추는 수수께끼 같은 소녀가 있다. 진주목걸이를 두르고 담배 물부리를 지닌 모습으로 니진스카가 파티의 여주인장역을 맡아 잃어버린 청춘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는 여자처럼 보였다. 사회를 풍자하는 암시가 더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시스 불랑이 음악을 제공하고 화가 마라 로랭생이 디자인을 맡은 작품 암사슴들은 상류사회관객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또한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와 호앙미로가 디자인하고 니진스카가 안무하였던 「로미오와 줄리엣 1926」은 남녀가 비행기 속에서 사랑을 하게 되어 도피하는 것을 끝으로 맺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1926년 니진스카는 발레뤼스를 떠난다.
역사상 위대한 춤가는 거의 예외 없이 춤가문 출신 이였던 것처럼 니진스카의 위대한 천재성이 이룩한 업적도 그의 혈통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녀의 예술성과 창조성은 디아길레프를 만나기 전부터 본능적으로 있어 왔고 그 빛의 시작은 다시 디아길레프와 함께 일하면서 그녀가 처음 맡게 된 「오로라의 결혼식」이였다.
20세기 러시아 문학과 다른 예술에 있어서의 고전주의의 부활의 흔적은 황실발레 작품들 중 잠자는 숲속의 미녀(The Sleeping Beauty1897)」를 회고주의 단계에서 이룩한 업적으로「잠자는 공주(The Sleeping Princess)1921」로 제목이 바뀌어 탄생했다. 그 후 내용이 축약되어「오로라의 결혼식(Aurora's Wedding)1922」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었다. 이 작품을 니진스카는 모든 능력을 시험할 수 있는 무대로 마련했고, 러시아 발레사에 20세기로 이어지는 새로운 창작 시대의 서막으로 장식하였다. 타국의 예술형식을 러시아의 상황에 맞게 고치고 다듬는 과정에서 18세기의 업적들을 개발하는 동시에 러시아 발레의 미래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며 두 시대를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신고전주의를 찬미하는 것으로 프랑스적인 색채를 띠지만, 점차로 러시아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다리우스 미요의 음악에 따라 니진스카가 만든「파랑색 기차(Le Train Bleu)1924」는 제목과는 달리 기차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 목적지, 즉 프랑스 도빌의 상류층 휴향지를 묘사하였다. 유명한 디자이너 코코샤넬이 만든 세련된 스포츠웨어를 걸친 춤꾼들은 조각가 앙리로랑이 디자인한 입체파 풍의 해변과 발레뤼스의 새 신참자이었던 영국의 춤꾼 돌린의 곡예적인 묘기로 보여주었다. 니진스카는 당시의 테니스 참피언이었던 실존인물 수잔 렝글렌을 그대로 본따서 테니스 시합군의 역을 다듬어 보여주었다. 유행을 따르는 프랑스 사회의 해변가 활동을 그린 이 발레 작품의 휘장막에서 해변 가에서 뛰고 있는 두 여인을 그린 피카소의 작품에서도 움직임의 형태가 나타난다. 이런 인물들의 위풍당당함은 고전적인 모델에 기반을 두어 그려졌지만 움직임의 자유로운 기쁨은 순전히 디오니소스적인 요소가 가미되었고 고전 모티브는 주제나 시각적 참고로 사용되었다.
발레의 추상발레를 표현하는 언어로 1920년대 작품은 니진스카의「결혼(Les Noces)1923」으로 순수한 추상발레로, 발레뤼스의 레퍼토리에 등장한 니진스키의 세 번째 발레인 최초의 현대적 소재의「유희(Jeux)」에서 모태를 지녔다고도 할 수 있다. 니진스카가 고백하고 있듯이 그녀에게 바슬라프 니진스키는 그녀의 오빠요, 위대한 친구였고 니진스키와의 나이와 성의 차이가 우정의 밀착된 유대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공유했다. 놀이와 장난과 슬픔까지를, 우리는 집에서나 황실극장의 학교에서도 함께 자랐다. 우리는 똑같은 교육을 받았고 같은 인상을 공유했으며 같은 환상에 매혹되고 같은 꿈을 지니고 있었다.” 고 했듯이 두 남매가 공유하며 지향했던 이 발레는 후에 추상발레의 작품으로 니진스카에 의해 「결혼」으로 실현하게 되었다.
오늘날 추상발레로 평가되는 「결혼」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나탈리아 곤차로바의 장치, 앙세르메의 지휘로 1923년 6월13일 파리의 케테 리리크 극장에서 초연 되었다. 머리수건 아래 뒤로 꽉 매어진 머리 스타일의 검정 점퍼와 하얀 블라우스 의상을 동일하게 입은 여성춤꾼들, 검정과 하얀색을 가진 관습적인 러시아 농부 의상을 입은 남자의 대열 그리고 니진스카의 주장에 의해 의상이 안무를 정확히 반영하는 위엄 있는 단순함을 지닌 디자인으로 바뀌어졌다. 니진스카의 「결혼」에서 절제된 의상들은 농민들의 절박한 강인함을 전달하려는 니진스카의 의도였다. 장중한 장치와 갈색 및 백색의 간소한 의상들은 결혼을 공동체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수단으로 보아야 하는 필연성에 지배되는 세계를 묘사하였다. 신랑, 신부, 그리고 양가부모들은 개인으로서보다는 우주적인 제의의 참여자들로 그려졌다.
춤꾼들의 군집에서 대칭을 강조하고 여성춤꾼들이 인물들이 길게 늘여진 실루엣모양으로 비치게끔 쁘웽뜨 자세를 취하게 함으로서 추상적인 성질을 드높였다. 등장인물들의 몸짓은 형식화를 이루게 처리되었으며 그들 상호간에의 행동은 대체로 통제되었다. 많은 움직임들 예컨대 여성춤꾼들이 쁘웽트로 바닥을 찌르는 동작과 반복되는 묵직한 도약에 담긴 가파른 힘은 생존하는데 강인함과 지구력이 필수적인 세계를 연상시켜준다.
이후 영국 로열 발레 단장이었던 프레데릭 애쉬톤(Frederick Ashton)경은 1966년 니진스카를 코벤트 가든(Convent Garden)으로 초청하여 안무의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니진스카는 이후 희극적인 발레나 시대적 풍자 그리소 조화로운 음악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을 창출하려고 하였음에도, 결코 선형적인 모형과 형태의 건축양식 안무특징인「결혼」의 간결한 방식으로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상 그 후에 그녀가 이 안무양식에 대한 다소의 노력을 보인 것은 「결혼」이후 20년이나 지난 1944년이었고, 이것은 인터내셔널(International)발레단을 위한 무소르스키(Moussorgsky)의 작품인 <전람회의 그림>을 안무했을 때였다.
러시아발레의 스타일에서 20세기에 처음으로 모던으로 구별되기 시작할 즈음 전통을 이어 받아 현대적으로 새로이 한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는 추상발레 선두주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니진스카의 춤 움직임과 공간구성의 파격적인 파괴는 그녀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또한 우리에게 전해준 강렬하고 추상적인 움직임과 제스처는 무척 새로웠을 만큼 예술성과 창조성을 보여주었다. 에드윈 덴비(Denby)가 니진스카를 추상적인 안무와 음악의 부합이 더욱 완벽하게 일치하는 했다고 했듯이 그녀의 안무스타일에서 잠재력의 실현은 니진스카를 근대발레의 중요한 안무가로 새로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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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07.27 -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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